세 번째 살인은 중의적인 의미로도 쓰인다. 말그대로 미스미가 진짜로 세 번째로 살인을 저지른 걸 수도 있지만 그 행위를 포함해 미스미가 자살처럼 사형선고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내용을 번복해 스스로 죽음에 이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로 사법계가 미스미에게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게 방조한 것을 세 번째 살인으로 볼 수도 있겠다. 

 

미스미를 판사였던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텅빈 그릇, 아들은 변호사 시게모리는 단순한 그릇이라고 평가한다.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은 걸 후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미스미를 변호하게 된 사람은 판사의 아들인 시게모리. 나중엔 시게모리만이 미스미의 무죄를 믿으려고 한다. 미스미는 그런 시게모리에게 조롱하듯 자신이 살인자라는 걸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혼란스럽게 말한다. 미스미는 시게모리의 아버지에게 들은 얘기가 내면화 되어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데 아들에게 행한 일종의 복수라고 봐도 될까?  

화면은 시종일관 어두운 톤으로 인물을 비추며 이야기 하나에 집중하지 않고 일본 사회 문제 등 다양하게 건드는데, 산만하지 않게 꽉 잡는다. 힘을 준 대사가 많은데 감독이 관록이 있어 그런가 도드라지지 않게 스며들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상처주는 정말로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있을까?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가 만든 게 아니라 태어날 때 결정이 된다. / 가족도 이해를 못 하는데 남이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내에서 꾸준히 묻는 질문들이다. 

 

같은 사람의 손이지만 그 손으로 카나리아를 죽이기도 살려주기도 한다.  
과연 심판한 걸까, 구원한 걸까

생각할 거리와 함께 여러 가지 대조되는 상황을 만들어 보는 맛이 있었다.

 

미스미와 시게모리가 접견장에서 투명한 벽에 가로 막힌 채 대화를 나누는 부분은 모든 장면이 강렬했다. 같이 숨죽여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미스미가 진짜 범인이었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표면적일뿐 진짜 메시지는 숨겨놨다.

 

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 감독의 영화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무겁지만 좋은 영화임에는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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